그 기록에는 무슨 사연이 담겨 있을까? 그리고 기록물의 모습은 요즘과 어떻게 다를까?
‘고문헌’으로 통칭되는 각종 기록물을 통해 옛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시대의 고민, 역사의 쟁점을 엿볼 수 있는 공간, ‘기록문화실’은 우리 삶에 있어서, 또는 역사에서 기록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보는 공간이다.
기록문화실의 전시자료는 오랜 세월 화성을 지켜온 문중이나 단체에서 소장해온 기록물을 중심으로, 전적, 공·사문서, 기록이 있는 그림 등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고문헌이다. 정조의 야망, 그 든든한 지지기반 초계문신들의 시험답안지 ‘시권’,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자 잔치를 열어주고 특별히 재산을 떼어주며 작성한 ‘별급문기’의 경사스런 분위기, 가난을 못 이겨 처와 딸을 노비로 팔아야 했던 ‘자매문기’의 슬픈 사연을 만날 수 있다.
국왕-홍진문 / 1648년(인조) / 남양 홍씨 정효공파
홍진문을 분충찬모정사공신 가선대부 행 수원도호부사 남창군 奮忠贊謨靖社功臣 嘉善大夫 行 水原都護府使 南昌君으로 임명하는 고신告身.홍진문은 인조 26년(1648) 6월에 임명되어 효종1년(1650) 정월 병으로 파직되기까지 1년 7개월여 동안 수원도호부사로 재직하였다.
장용영대장壯勇營大將김의 / 1790년(정조14) / 해풍 김씨 남양쌍파
장용영대장이 전훈련원前訓鍊院 정正 김의를 장용영 초관哨官으로 임명하는 차접差帖. 장용영은 정조시기 창설된 군영으로, 한양의 내영內穎과 화성 유수부의 외영外營으로 운영되었다. 김의는 이후 정조 20년(1796)에도 장용외영 친군위별장 壯勇外營 親軍衛別將으로 임명되어 장용영에서 두 번 근무하였다.
2-7 / 국왕-차도항車道恒 / 1794년(정조18) / 연안차씨 강렬공파
건릉乾陵 59년 차도항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어진봉안각 위장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御眞奉安閣 衛將으로 임명하는 고신告身. 어진봉안각 위장은 현륭원 내에 정조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봉안각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이 고신에는 발급월일이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정조 17년(1793) 11월 차도항을 동지중추부사에 단독으로 추천하는 기록과 봉안각 위장 윤치홍尹致宖과 차도항에게 각각 궁자弓子 1장씩을 상으로 내리라는 정조 18년 1월 초에 발급된 것으로 보인다.
1811년(순조 11)추정 / 거창 신씨
의금부 관원들이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구성한 모임의 장면과 참석자를 수록한 첩이다.계회도에는 바깥문과 안문, 마당에 문지기가 지키고 있고, 관아건물의 좌측 내부에 10명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들이 둘러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18세기 / 거창 신씨
신이복(1698~1786)은 1729년(영조5)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병조참관 등을 역임하고 정2품 자헌대부에 올렸다.
이 초본은 초상을 그리는 단계에서 처음으로 인물을 묘사하는 밑그림이다.
1774년(영조 50) 추정 / 수성 최씨
수원부의 유생62명이 수류면(현재 장안면) 독정리의 정씨부인에게 열녀 정려를 내 달라고 요청하는 소지이다. 정씨는 남편과 딸이 죽자 남편을 따르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