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는 마한의 여러 소국이 분립해 있었으며, 한성백제의 팽창기에는 마한 진출의 길목으로 백제의 국가적 역량이 집중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삼국통일기와 남북국시대에는 당대
최고의 무역 거점인 당성을 통해 선진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봉림사 등의 사찰을 중심으로 빛나는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조선초기에는 삼남지역
물산의 집산지이자 경기남부의 중심도시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조선후기의 화성시는 사도장헌세자의 현륭원(현 융릉)과 정조의 건릉을 비롯하여 당대 최대의 왕실 원찰인 용주사가 조성되어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정조
이후의 여러 국왕들은 물론 대한제국의 황제와 친왕들도 꾸준히 융·건릉을 찾아와 선왕을 기리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근대에는 개항장과 서울에 인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새로운 문물과
종교를 빠르게 수용하였고,민족교육을 토대로 한 근대교육을 발판으로 독립운동이 왕성하게 진행되어 일제의 잔혹한 보복이 자행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화성시는 급속한 도시화의 진행 속에서도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이 공존하는 도시로 발전하고 있으며, 역사문화실에서는 지역의 이러한 역사적 특성과 문화적 특수성을 관련 유물들과
함께 통시대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비봉면 구포리 / 구석기
차돌(맥석영脈石英)을 마치 공처럼 둥글게 다듬어 제작한 여러면석기로 사냥돌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남면 계향리 /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발형토기鉢刑土器로 다소 거친 태토胎土로 제작되었으나 황갈색 색상과 기형器刑을 잘 보존하고 있다.
고려시대
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로 그릇 표면에 철분이 많이 함유된 붉은 색 안료로 부귀와 장수를 상징하는 모란무늬를 그려 넣었다.
장안면 독정리 / 조선시대
명기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내세에도 영원하기를 기원하며 무덤에 묻는 부장용 그릇으로 실생활에서 사용하던 그릇 등을 축소된 형태로 만들었다.
매송면 송라리 / 일제강점기
매송면 들목조씨 문중에서 제사 때 사용하던 유리주전자로 근현대시기 유리재질의 생활용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매우 희귀한 유물이다.